저는 우리 교회가 자라나길 소망합니다. 질적으로 뿐만아니라 수적으로도 자라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야망이라고 한다면, 저는 야망을 품은 목사가 맞습니다. 저는 은혜와 평강교회가 수적으로도 잘 성장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망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돌아오는 4월 이면, 교회개척 5주년이 됩니다. 2주년 감사 예배까지만 하고, 3주년과 4주년을 계속 코로나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근래에 대면 예배가 다시 시작 되었지만, 오미크론의 등장으로 다시 온라인 예배로 돌아섰습니다. 2월 셋째주부터는 다시 대면 예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읽을 즈음이면, 아마도 대면 예배가 시작되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 되면서, 목사의 마음에 약이 오르는 상황들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교회를 찾는 분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 있는 일들 이었습니다. 다른 때에는 한번도 이런 일이 없다가, 하필 대면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를 하고 있는데 이런 문의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면 예배에 갈증을 느낀 분들이 이곳 저곳 문의를 하는가 봅니다.
문의 전화를 받고 저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면예배를 좀더 일찍 재게 해서, 문의하는 분들이 우리 교회에 올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문장처럼 스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사람의 열망이 앞서지 않게 하라” 입니다. 대면 예배를 앞당겨서 그 사람들을 오게하려는 마음은 사람의 열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문의하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와야 할 분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분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분들도 아닐텐데, 그런 열망을 따라 일하는 것은 사람의 열심일 뿐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으면, 자기의 열망을 앞세우게 됩니다. 일의 결과가 내 수고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우리 삶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남은 좋은 열매는 모두, 내가 계획하거나 수고해서 얻은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서있어야 할 자리에 충실히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물처럼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얻으려고 계획하거나 수고 했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해야 겠습니다. 결과를 향해 달리는 삶이 아니라, 주어진 길에 충성 스럽게 서있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서 있을때 우리에게 선한 열매를 선물 처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일이 기대와 달리 갑자기 일어납니다. 1994년 7월 9일, 북한의 김일성 사망 소식이 그랬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을 만났고,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 했습니다. 그러나 16일뒤, 갑작스럽게 죽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 당국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로 북한의 상황은 급격히 변화 하게 됩니다.
현제 북한의 상황도 갑작스런 변화를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계는 북한이 개방과 개방으로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바램과는 너무 다릅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느날 북한이 열린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들를 역사를 통해서 익히 보아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 행동으로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재규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갑자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군부도 어느날 아침 갑자기 내려진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역사의 변화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빠르고 갑작스럽게 진행 되었습니다. 사건이 다 끝난후 그 역사의 시작과 끝을 뒤돌아 보는 우리들은 그 사건이 담고 있는 역사적 점진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살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역사의 당사자들에게 그것들은 절대로 점진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찾아온 급격한 변화 였습니다.
이런 갑작스러움은 우리앞에 다시 한번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신학자들은 재림의 점진성과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에 대해서 말합니다. 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건들이 모두 성취되어야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점진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일 일어 났을때 너무 갑자기 일어났다고 느끼게 될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주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며, 속히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어야할 시간입니다. 종말론으로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유지하고, 주어진 삶을 변함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함이 우리의 계산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하고 믿음의 순전함을 항상 점검하며 살 때입니다. 역사는 예측 가능하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더욱 깨어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딸 성언이의 학교 친구가운데 네이트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님 대신 외할머니가 주로 아이를 돌봐 주셨는데, 등하교 시간에 마주치면서 할머님과 아내는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얼마전 할머님이 아내와 차를 한잔 하자고 연락을 해오셨습니다. 만남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대화의 내용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노인들이 죽는데, 자신은 죽음이 두렵고, 아직 죽을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백신이 나와도 안 맞을 것인데, 안전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전 페밀리 닥터의 권면으로 피검사를 했는데, 간이 좋지 않으니 전문의를 만나라는 권면을 들었습니다. 고지혈증에 대한 경고는 늘 듣던터라, 이번에도 한 소리 듣고 말겠거니 했는데, 전문의를 만나라고하니 마음이 덜컹 했습니다. 아내도 부인과 검사를 했는데, 수술을 해서 떼어내야 하는게 있다고 합니다. 둘다 급한 상황은 아닌것 같습니다. 아내의 수술 일정이나 저의 전문의 상담날자가 한달이 지나도 잡히지 않는 걸 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난 후로, <죽음>이 먼 이야기가 아닌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준비 되셨습니까? 성경은 전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히브리서 9:27)” 고 말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후에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죄값을 치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약속>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안에서 심판을 면할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안에 속량(Redemtion), 다시 말하면 죄사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1:14).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붙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없다!” 선언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앞에 서기 전에 이 <약속>을 확인하고, 점검하고,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복음을 무식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볍고 천박한 종교라고 말합니다. 복음앞에서 이러한 반응은 비록 지금만의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때도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지혜롭다 말하는 헬라인들은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여겼고, 종교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리끼는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아침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속에 <약속>해 두셨고, 그 <약속>을 붙들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사함을 받도록 <약속>해 두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예수님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앞에 설 날을 준비하십시요. 그것은 복음이신 예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허리를 다쳤습니다.
열흘이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한달이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받아들이고나니, 이것도 유익이 있습니다. 매일의 의무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졌고, 못한 일에 대한 정당한 핑계가 생깁니다.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이해를 받습니다.
무능력한 나를 받아들이니, 마음이 낮아집니다.
마음이 낮아지니, 작은 것들이 보입니다. 묵상은 침묵을 타고 찾아오고, 바람은 소리없이 다가와 어깨위에 머뭅니다. 떨어진 돌하나가 외롭다고 말을 걸고, 해를 받은 들꽃은 미소띈 인사를 건냅니다. 의미있는 것들은 작은것들 안에 다 들어있었는데, 아프고난 후에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집니다. 왜 아파야만 이것들과 조우하게 되는것일까요? 왜 불편해야만 숨겨진 세상이 보이는것일까요?
허리를 뒤척이며 아침잠을 깨웁니다.
겨우 겨우 몸을 틀어 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건강할때는 느껴지지 않던 주님이 가까이 느껴집니다. 고상한 경건으로 기도할때는 침묵하시던 주님께서, 삐딱히누워 주절거리는 기도에는 응답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 없이는 살수 없다고…! 주님이 느껴지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목마르다고…! ‘ 그토록 기도 했건만, 멀쩡할때는 모른체 하시더니, 아프니까 돌아보십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혜는 고이고, 감사는 흐릅니다.
깊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주님께 무어라 기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불편함속에 남겨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건지…불편함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건지…허리가 나아지면 은혜가 사라질까 염려…허리가 안 낳으며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 염려…이렇게 기도하면 몸을 더 비트실까 걱정.. 저렇게 기도하면 주님을 잃을까 걱정…얼른 나아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싶다가도, 높아진 마음에 주님을 잃을까 염려가 됩니다. 서서히 좋아지는 허리가 좋기도하지만 불안하기도 합니다.
죽을만큼 아픈건 아닌가 봅니다.
만약 그랬다면, 만사 제쳐두고 고쳐달라 기도 했겠지요. 그러지 않으니 고상한 감성에 취해 사치스런 고민을 하는 것이겠지요. 오래도록 병상에 계신 분들께는 송구하고 죄스런 투정일 뿐입니다. 낫게 해달라고 기도 해야하는것이 옳은줄 압니다.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 다시는 핑계댈 수 없는 현실앞에 서야 할줄 압니다. 달란트를 결산하실 주님앞에 충성된 종으로 서야 할것 같습니다.
어느덧,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데로 몸둥이가 움직입니다. 바라는 것 하나가 있다면, 끝까지 주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더듬어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날마다 주님품에 안겨 있게 해달라는 바램 뿐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이걸음을 누군가는 병상에서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빚진 마음으로 살아겠습니다. 주님, 종이 바르게 움직이도록 도와 주세요.
8월 두주간을 휴가로 보냈습니다. 쉼을 가질 수 있도록 베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코로나 상황속에서 휴가를 가진다는 것이 저에게도 망설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모든 것을 잠시 멈춰야 한다는 절박한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사역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컴퓨터앞에 종일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이 많은 스트레스가 된것 같고, 개척 3년동안 무작정 달려온 것도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준것 같습니다. 요 몇 주 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휴가를 대범하게 챙겼습니다.
막상 휴가를 결정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든 곳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던중 어떤분께서 그분의 카티지에서 한 주를 쉬고 오라고 제안해 주셨습니다. 문의한 것도 아닌데 때마침 그런 제안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쉬어 가라 말씀하시는 것 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제공해주신 곳으로 올라가 일주일을 보내고 내려왔습니다.
숙소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었습니다. 첫 2일간은 아침 점심 저녁 낙시만 했습니다. 손바닥 만한 물고기들을 잡고,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잡던 <떡먹지>란 개구리도 잡아 딸래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딸래미의 낙시에는 기대치도 않던 <붉은 귀 거북이>가 잡혀 올라오고, 그냥 담가 두었던 저의 낙시대에는 등딱지가 45cm 정도의 <아메리카 민물 거북이>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모든 활동이 나를 어린시절 내가 자라온 시골로 되돌아가게 만든것 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지쳐있던 육체와 마음이 깊은 쉼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이 되어 작은 일이 생겼습니다. 카누를 들어 올리다가 허리를 삐끗 한것입니다. 허리 나가는 일이 연중 행사처럼 찾아 오는터라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침대주변을 맴돌아야 했습니다. 아쉬움이 컸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휴가 후반부를 가만히 누워서 묵상 하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침대에 누워 <앞으로의 교회 사역>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맴돌았지만, 정리되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것을 붙들면, 저것이 문제고, 저것을 붙들면 다시 이것이 문제 였습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는 가던 길을 충실히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 일과 새 방향>이 있다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끄실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음을 그렇게 정하고 생각을 멈추고나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이끄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파도 처럼은 아니지만, 실오라기 잡히듯 견고하게 잡혔습니다.
코로나 상황속에서 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사람은 아무런 계획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충성스럽게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실것입니다. 은혜와 평강교회에 보이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합니다.
저는 남자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을때마다, 선생님들께서는 엉덩이에 빠따를 치셨습니다. 잘못했으니 그 대가로 아프고 반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피해보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선생님께서 몽둥이를 휘두르면, 같은 방향으로 엉덩이를 뺴거나, 바지안에 공책을 넣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더욱 화가 나셔서 더 많이 때리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아프라고 때리면 아파하고 반성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의 노만 더 키울 뿐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와 비슷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9장 9절-10절입니다.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이사야 9:9-10) 하나님께서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아파하라고 징계를 주셨는데, 그들이 마음은 돌이키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벽돌이 없으면 돌을 다듬어 쓸것이고, 뽕나무가 뽑혔으면 백향목을 대신 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내 힘으로 징계를 극복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는 멸망하게됩니다.
코로나 사태속에서 교회들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어려움은 더해 갈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묻습니다. 교회들로 하여금 아파하고, 가던 길을 멈추라고 이 상황을 주신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만 돌아봐도, 아파하고 돌이키기 보다는, 이 상황이 주는 피해만 극복하려 발버둥 치는것 같습니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벽돌이 없으면 돌을 다듬어 쓰고, 뽕나무가 뽑혔으면 백향목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프게 하셨다면, 멈추어 서서 삶을 돌이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각자에게 그 방향과 길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마음은, 마음을 낮추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인것 같습니다. 아픔이 크지 않다고 가던길을 고집 하던가, 아니면 손해만 피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코로나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나에게 겸손한 마음,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듣게 하시길 소망합니다. 아파야 한다면 충분히 아파서, 잘못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다시 들어서길 소망합니다. 우리를 포기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고치고 회복 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얼마전 교단의 목사님들, 그리고 토론토 지역 교회의 목사님들과 따로 만남을 가졌습니다. <코로나 상황과 목회>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두번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결론은, 코로나 상황에 대해서 아무도 구체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목회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사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언제 여름 성경학교를 해야 하는지…청년부 수련회를 할 수 있을지…미뤄진 선교사 파송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인지…답을 낼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그때 그때 주어진 상황에 대처해 나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계획을 내려놓을 것을 명령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걷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기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하루 내리는 만나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름기둥이 아니면 사막의 더위를 피할 수 없었고, 불기둥이 아니면 어두움과 추위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그것들이 멈추면, 200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길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 한 분 뿐 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의존 했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취한 일로 우리의 영광을 드러냈을 것입니다. 코로나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교만해진 사람의 계획을 모두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깨우치시고, 다시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언 20:24). 모든 일의 주권자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의지의 본성>은 단번에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를 고치실 것입니다. 그 과정이 힘겹고 아파도 축복인것은,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고, 평안으로 가는 길이고, 승리로 가는 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을 내려 놓는 연습을 다시 해 나갑니다.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사역자의 길로 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내 인격과 주변 환경이, 사역자의 삶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혀 다른 길이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계속 가다보면 내 사업도하고, 돈도 벌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픈 엄마와 누나를 돌보고, 아버님께서 남겨두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나의 계획도 아니었고, 바램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시작된 삶이 현재로 이어졌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변수>가 지금의 삶을 낳은 것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남유다를 침공했습니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앗수르에 의해 점령 당했고, 남유다도 1차 침공으로 46개의 도시가 점령 당했으며, 20만 150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쳐들어와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입니다. 결과는 불보듯 뻔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깁니까? 산혜립이 갑자기 본국으로 철수합니다. 왜 그랬던 것입니까? 전염병이 돌아서, 그가 이끌던 군사 18만 5천명이 하룻밤 사이에 시체로 변한것입니다. 또한 본국으로 돌아간 산헤립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그 후, 앗수르의 전성기는 저물기 시작했고,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 당합니다. 하룻밤에 일어난 전염병이란 <변수>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입니다.
몇달 전까지만해도 우리는 <코비드 19>라는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늘상 하던대로 경제의 흐름을 분석했고, 정치인들도 늘상 하던대로 정치의 흐름을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의 미래 전망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한 분석대로 미래가 전개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던 <변수>가 일어났습니다. 코비드 19입니다. 중국에서 갑자기 발생한 바이러스는 몇달만에 온 세계로 번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전혀 걸어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코비드 19>라는 변수가 세계를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이끄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철학자는 그것이 <이성과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철학을 잘 모르지만 지금 분명한것은 <변수>가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변수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 변수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위해서, 우리 삶에 변수를 던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가능으로 결론낸 것을 가망으로 바꾸시고, 가능이라 결론낸것도, 불가능으로 만드십니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 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망없는 현실 때문에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요. 또한 자신 만만한 가능성 때문에 너무 교만해하지도 마십시요.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것을 뒤집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지금 하나님앞에 옳은 길에 서 있는가를 점검하며,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 뿐입니다. 우리를 선하게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흔하지 않은 속담이 있습니다.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줄 안다>라는 속담입니다. 여름에는 소나무의 푸르름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모든 나무가 푸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소나무의 푸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모든 나무는 죽고, 소나무만 푸르기 때문입니다. 이 속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난 속에서 사람의 진위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누구나 나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내가 별볼일 없어지면 많은 사람이 떠납니다. 세월이 좋을 때는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같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찾아오면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의 푸르름이 보이듯이, 고난이 찾아오면 사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코로나 상황속에서 이 속담이 <교회들>에게 적용됩니다. 코로나 전에는 모든 교회가 평안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에 직면하자, 교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고, 재정도 흔들리고, 계획했던 사업들도 차질을 빚었습니다. 교회를 담임 하고 있는 저도 염려와 근심에 휩싸였고, 여러가지 인간적인 생각들이 들어왔습니다. 코로나 하나로 흔들리는 교회들과 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습니다. '작은 고난에 이렇게 흔들리는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역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의 꿈을 향해 달렸던 것일까?’ 라고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고전 3:13b,14,15a). 주님의 날에 <불>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공적>이 그 <불> 앞에 놓인다고 합니다. 그 때 우리의 공적이 불 앞에서 타버리면 그 공적은 가짜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공적을 쌓은 이는 해를 받을 될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납니다. 모두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일들이 주님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날에 불 앞에 설 때 판별됩니다.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면, 불 가운데서도 타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 세운 것이라면 타고 없어질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타버릴 공적을 쌓느라 열심을 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우리의 푸르름을 점검해야 할 시간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으로 넘어갈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거없는 확신이었지만, 서구인들 대부분은 은근히 동의하는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확진자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방역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진단 키트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미국과 유럽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초기대응> 곧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말합니다.
6전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탑승객 476명가운데 304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가장 큰 실수는 구조의 <골든 타임>을 놓친것입니다. 사고 직후 해양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구조가 바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 큰 배가 금방 가라 앉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경험이 부족한 해경은 허둥지둥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304명을 품은 배는 바다속으로 가라 앉았습니다. 구조의 <골든 타임>을 놓친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저는 우리가 또 다른 <골든 타임>앞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앞에서 우리의 삶을 고쳐야 하는 골든 타임 말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예배가 동영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근본적인 질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가? 내 신앙의 표지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시간을 주셨을까요? 우리의 신앙을 다시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서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라고 <골든 타임>을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볼까요? 첫째, 행위를 고치고, 악한 길에서 돌이킬 때입니다. 남유다의 멸망 앞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반복적으로 외친것은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행위를 고치라>는 메세지였습니다. 만약 돌이킨다면 심판의 날에 살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백성은 그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에 인도함을 받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면, 다시 주님의 음성에 집중해야 할 시간입니다. 셋째, 환난가운데서 믿음을 지킬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의 날이 가까와 올수록,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준비되어야합니다.
바울사도의 권면대로 자다가 깰때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교회와 성도가 흔들립니다. 교회가 바르게 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흔들리고, 성도개인의 믿음도 흔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점검하고 다시 세우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 언제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까이 와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골든 타임>을 지혜롭게 잡고, 우리 신앙의 본질을 다시 세우게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를 개척한다고 할 때, 교제하던 캐네디언 목사님께서, 지금의 교회를 방문해 보라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주소를 들고 교회를 찾아왔을 때 실망이 컸습니다. 기대했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대했던 곳은 이런 곳이었습니다. 1)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2) 눈에 잘 띄는 곳, 3) 활용할 공간이 충분한 곳 입니다. 그런데 그 세가지중 어느 것도 맞는게 없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만나려고 교회 지하로 내려갔는데, 어둑어둑하고 침침한게 영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이곳은 아니라는 결론이 마음에서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저를 보자마자 자신의 교회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용료는 안내도 되니까 부담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교회 개척을 해봐서 이해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다른 곳을 더 알아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수 없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푸시는데, 거절하는 것은 너무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떠밀려 은혜와 평강교회는 지금의 위치에 개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에 대한 <감사>가 커집니다. 우리가 본교회보다 더 자주 건물을 사용하는데도, 아무 불평 없이 건물을 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 교회와 본교회 모임이 겹치면, 본교회 모임을 옮겨 주시기도 합니다. 새들어 사는 한인 교회들의 형편을 알기에 감사가 안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머물라고 하는 곳에 머물면 <평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위치를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한인 타운 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을때 입니다. 그곳은 교회 간판을 보고 교회에 오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위치를 옮기고 싶은 조바심이 올라옵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곳으로 인도 하셨고, 어떤 평안을 누리게 하셨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싸인>이 있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한다면, 주님은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이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지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계획을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싸인을 따라 움직였는데, 그것은 구름이었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하나님의 싸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1년을 머물면 그곳에 일년을 머물고, 구름이 아침에 떴다가 저녁에 움직이면, 하루만에 짐을 싸서 구름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성도 개인은 어떻게 주어진 자리에 머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입니다. 엄마와 아빠, 남편과 아내라는 이름앞에서 해야 할 의무를 다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전도사라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의무를 선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회장과 서기라는 이름앞에서, 그 이름의 본질을 착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머물러야 하는 자리입니다. 조급함과 욕심때문에 스스로 지금의 이름을 떼어 버리고, 내가 원하는 이름을 향해서 뛰쳐 나가면, 그곳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지금의 이름앞에 충성되게 머물면, 하나님께서 다음 이름을 주십니다.
<메슬로>라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인간의 욕구가 다섯 단계로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존경의 욕구-자아 실현의 욕구” 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세가지의 욕구로 축약 해보고 싶습니다. <생존의 욕구-안전의 욕구-자아 실현의 욕구>입니다.
누구에게나 <생존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먹고, 배설하고, 후손을 만들어갑니다. 생존의 욕구가 확보되면,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작동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을 <확장하고, 유지 하려는 욕구> 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자아 성취>의 욕구입니다.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단계인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다른 사람보다 낳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세가지 단계에 따라 신앙 생활도 달라집니다. <생존의 욕구 단계>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먹고사는게 절실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그랬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야만 살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만 바라봤습니다.
<생존의 욕구 단계>를 지나면 <안전의 욕구 초기 단계>에 진입합니다. 그때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시기입니다. 도전과 번영이 함께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사업이 일어나고, 필요가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그 성취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왔음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기를 살아갈 때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서 도전 했고, 성취 했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문제는 <안전>이 확보 되었다고 생각될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내 안전은 흔들리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지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때가 그랬습니다. 치열한 도망자의 삶을 끝내고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안전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밧세바>로 향했고, 죄가운데 넘어 졌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자아 성취의 단계>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연인을 찾고, 큰집과 큰차를 사고, 명예와 권력을 쥐려고 합니다. 철학과 문학과 종교에 기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도리어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깊은 결핍>, 곧 <허무>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럴까요? 죄 때문에,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모르고, 엉뚱한데서 존재감을 확인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외에는 진정한 <존재감>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하나님께 나가길 거부하고, 계속해서 허무 가운데 방황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아 성취>는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욕구 상태에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변해가고 있습니까? 육체로 시작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인생입니다. <생존의 욕구 단계>에서 만난 하나님을, <자아 성취의 단계>에서도 여전히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대중적인 커피집은 팀홀튼입니다. 값이 저렴하고 맛있습니다. 커피 한잔에 1불 54센트 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커피 한잔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던 시절에 있었습니다. 4-5년전 신대원(Mdiv) 공부를 할때 입니다. 공부를 빨리 마치려고, 전도사 사역도 중단하고, 성언 엄마가 벌어오는 수입과, 우리를 아껴 주시는 주변 분들의 후원을 의지해서 살 때 였습니다. 집사람의 생일이 있는 달이면, 커피 한잔에 대한 갈등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작은 돈이라도 모아서, 성언 엄마에게 생일 선물을 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기꺼이 주머니를 열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동전을 요구하는 홈리스 아저씨들을 만날때 였습니다. 그분들을 만날때마다 그냥 지나치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쩌다가 줄 돈이 없으면, 도리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동전을 따로 준비해서 다니곤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에게 그러지 말라고 권면 했습니다. 그분들이 그 돈으로 마약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권면 이었지만, 그렇다고 동정을 거절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분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여유를 주셨습니다. 더이상 팀홀튼 커피 한 잔 때문에 갈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필요한때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 사라진 모습 하나가 있었습니다. 홈리스 아저씨가 다가와도, 동전을 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미안해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대신, 이성적인 권면을 떠올리며, 마약을 하게 하지 않은 것이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무엇인가 잃고 사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긍휼>입니다. 그 것을 담고 살았던 <마음>입니다. 홈리스 아저씨에게 전달했던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세 그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삶을 움직이는 것은, 냉철한 논리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입니다. 세상이 험악해 지는 이유는, 정교한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그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마음은 회복하겠다고 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로 부터 부어지지 않으면, 그 마음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마음을 갖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부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회개를 안하는게 아닙니다. 회개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서, 입술로 중얼거리기는 하는데, 마음에 회개가 없으니,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먼저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져 앉아 엉엉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 마음을 부으시면, 그 때 진실한 회개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잃은 마음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면, 돌이키고 회복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마음을 회복할 수 없다면, 그 마음을 붙들고, 하나님앞에서 <애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 답답함 때문에 슬피 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가 크신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가 잃은 마음을 다시 부어 주실 것입니다. 신실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제가 교제하는 분들 가운데는 연세있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과의 교제는 늘 안정감이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 드러나도 넉넉함으로 이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지혜는 저의 삶과 사역에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분들과의 교제가 감사하고 유익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연세드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을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을 사신것만으로도 그분들은 우리들의 존경을 받으시기에 충분합니다.
아흔을 바라보시는 목사님께서 <골짜기 백합화>라는 성경 구절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음 하셨던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만날때마다 자주 해주셨던 말씀인데, 그날처럼 마음에 깊이 들어오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일찍 깨달았어야 하는 말씀인데, 이제야 깨닿게 된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세상의 풍조를 <바벨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모두가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하고, 스스로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한발짝 물러나는 것은 <루저, looser>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모로, 돈으로, 지식으로, 힘으로 열심히 자기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은 <골짜기 백합화>같은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골짜기 백합화>는 아가서 2장 1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백합화는 향기가 진하고 화려한 꽃입니다. 그런데 이 꽃이 <골짜기>에 피어 있는 것입니다. 골짜기는 물도 없고, 초목도 자라지 않으며, 거친 바람만이 바위틈 사이를 지나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골짜기는 <고난, 눈물, 시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고난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 <화려하고 향기 짖은 백합화>가 피어있는 것입니다.
<골짜기 백합화>는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김니다. 그러나 광야를 걷는 여행자는, 바람에 실려온 강열한 향기때문에, 그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향기를 따라 가다보면, 마침내 놀라운 광경을 발견하게 되는데, 감추어진 곳에 백합화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것입니다.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영혼은 그 향기와 아름다움에 쉼을 얻게 됩니다. 골짜기 백합화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숨김으로 그 능력을 확대시킵니다.
은혜와 평강교회가 골짜기 백합화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깊은 골짜기 속으로 스스로 물러나지만, 그 진한 향기를 잃지 않는 교회 말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 숨어 있지만, 그향내와 아름다움때문에, 인생에 지친 여행자들에게 쉼을 주는 교회 말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이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성도 말입니다. 한발짝 물러 나는 삶을 삽시다. 그러나 향기는 잃지 않는 삶을 삽시다. 골짜기 백합화처럼 자신을 숨김으로 능력을 드러냅시다.
고향 후배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해병대 후배이기도 합니다. 어렸을때는 모두가 철없어 보여서 그랬는지, 그 친구가 신앙을 가질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해오는 소식을 보니,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어디에 출석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가나안 성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안나가>를 거꾸로 읽어 만든 한국교회의 신조어 입니다. 신앙은 있지만, 회의를 느껴 교회를 떠난 성도들을 일컽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힘을 잃은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후배가 교회를 향해 이런 일침을 가했습니다. “교회가 <우물>을 만들면 되는데, <헌금해라, 전도해라, 봉사하라>고 강요만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심령이 갈급한 사람들에게 생수를 퍼 줄 <깊은 우물>을 교회가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테고, 강요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물이 귀한줄 아는 사람들이, 헌금을 해서 관리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올것이고, 봉사로 지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생수는 주지 않고, 모인 사람들에게 <헌금, 전도, 봉사>만 강요 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너무도 명쾌한 지적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식당에 누가 가겠습니까? 마실 차가 없는 찻집에 누가 가겠습니까? 영혼의 목마름이 해갈 되지 않는 교회에 누가 헌신 하겠습니까? ‘우물을 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목사로서 교회를 위해 우물을 파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많은 생각과 일들이 머릿속에 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설교입니다. 심령의 목마름을 해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구체화 되는 교회의 현장이 <설교>입니다.
설교자로서 저에 대해 두 가지를 다시 점검했습니다. 첫째는 <성결>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통로입니다. 통로가 막히면,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지 않고, 통로가 지저분하면, 하나님의 뜻도 희미해 져 버립니다. 성결에 있어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게 많습니다. 내 안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을 위해 날마다 분투합니다. 애씀을 멈추는 순간, 죄의 파도가 나를 삼키기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삼키도록 내버려 두면, 하나님앞에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멈추지 않고 성결을 위해 애씁니다. 둘째로는 말씀 앞에서의 <정직한 씨름>입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요지가 무엇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려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의도를 담거나, 청중의 기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정직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함께 교회된 여러분에게도 <우물 파기>에 동참하길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심령의 우물입니다. 예수님으로 부터 멀어지면, 심령의 기근으로 죽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다시 예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 우물 되시는 예수님이 흘러 나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목마른 누군가가 기대고 싶은 삶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시 깊은 우물을 파 나간다면, 모든 교회들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헤메는 <가나안 성도>들도 교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 부흥이 은혜와 평강 교회 속에서 시작되길 소망합니다.
목사가 목사에게 - 정학진 목사님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
15세 소녀의 투병기를 지켜보고 울었다.
문득 건강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이다. 사명임을 깨닫는다.
곰팡내 냄새나는 지하 교회,
서너명 교인이 전부인 셋방교회에서
월세 내는 날을 두려워하는 미자립교회가 존재하는 한
더이상 예쁜 건물은 축복이 아니다.
거룩한 부담이다. 사명이다.
뼈까지 달라붙는, 쇠꼬챙이 같이 마른 몸을 하고,
목마른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저 어린 것들이 있는 한,
하루 세끼 따박따박 먹는 것은
더이상 복이 아니다. 부끄러움이다.
잘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일이 아니다.
잘 먹게 되어 죄송하다고…
우리만 잘 먹는 게 못내 죄송하다고 기도해야 한다.
평생 한 번도 설교 요청을 받아 보지 못하고
부흥회 한번 해보지 못한 동역자가 있는 한
더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빚을 지고 살아왔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뼈를 깎아 보석을 만들고
훈련과 성실로 내 영혼을 맑게 헹구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 아파 울고 있는 교우가 있는 한
더 이상 내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는 게 복이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고 칭찬 거리가 많은 게
자랑이 아니다. 입 다물고 겸손히,
그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일이다.
호주의 어떤 신학교 총장님께서, 사역자 수련회 강사로 오셔서 전해주셨던 권면이 생각납니다. 쉼없이 달리기만 하면, 곧 번아웃을 경험하게 되는데, 적당한 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권면을 들을 당시, 저희들의 신체 나이는, 한참 혈기 왕성한 때 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단지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구인의 염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우리의 신체 나이가, 마음의 열망을 다 담아내지 못하자, 주변에서 번아웃을 경험하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그제서 그분의 충고가 <뼈있는 지혜>였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3가지의 <쉼>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밤과 낮으로 만드시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도록 하셨습니다. 둘째는 안식일 입니다. 6일동안은 열심히 일 하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쉬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니라, 소와 낙타들도 함께 쉬도록 하셨습니다. 셋째는 안식년입니다. 6년 동안은 열심히 땅을 일구지만,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이 세가지의 쉼은 낭비의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과 짐승에게는 다음 6일을 위한 충전이고, 땅에게는 다음 6년을 위한 지력 회복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없으면, 더 나은 수확도 없습니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식물의 성장은 둔해 졌고, 열매들도 몸을 키우지 않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입니다. 여름내 왕성 했던 생명의 활동은 모두 멈춘듯 합니다. 그러나 멈춘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식물은 열매를 익혀가고, 내년을 위한 새 생명의 씨앗을 숙성시켜 가는 것입니다. <멈춤>은 수확과 새 생명을 향한 <다른 패턴의 움직임>일 뿐입니다.
어릴적 외할아버지 댁에가면, 가마솥에 밥을 지었습니다. 구수한 밥을 얻으려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했습니다. 한참 불을 지피시던 할머니가, 불때는 일을 멈추고 일어서면, 그 곁을 지키던 저는, 밥 짓는 일이 다 끝난 줄 알고, 냉큼 부뚜막에 올라가 솥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혼쭐을 내시며 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계인 뜸 들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의 일을 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듯, , <멈춤>은 일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단계입니다.
한국 사람은 태생적으로 잘 쉬지 못합니다. 저도 그런것 같습니다. 그래서 쉰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어쩌다 쉬게 되면, 쉽게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적당한 멈춤과 쉼은, <하나님의 원리>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 없이 달렸다면, 잠시 멈추고 쉴 필요가 있습니다. 멀리 떠날 수 없다면, 한적한 곳에서 홀로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염려때문에 쉬지 못한다면, 믿음으로 쉬시기 바랍니다. 쉼이 필요 없다고 느끼신다면, 순종하는 마음으로 쉬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쉬지 못하고 있다면, 옆에서 쉴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쉼은 다음 생산을 위한 <또다른 패턴의 움직임>입니다.
지나던 길에서, 귀엽고 예쁘장한 <짐승>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 <교만>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집에 데리고와서 예쁘게 씻기고,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누구나 좋아하는 그 음식의 이름은 <자기 만족>이었다.
만족을 먹고 자란 교만이 근사한 모양을 갖추자,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꽤 매력적인데!”
보람이 있었다.
내친김에 더 좋은 음식을 먹였다.
음식의 이름은 <절제 없는 인정>!
<인정>을 먹고자란 교만은
더 품위있고 근엄한 모습으로 자랐다.
함께 산책을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 주었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교만과 나는 더이상 둘이 아니었다.
교만은 나로 말미암아 살고
나는 교만로 말미암아 존재감을 느끼게 되었다.
교만은 자랄수록,
더 많은 <인정>과 <자기 만족>을 필요로 했다.
결국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았다.
하지만, 자랄대로 자란 그의 식탐을 다 감당해줄 수는 없었다.
더이상 줄게 없었다.
배고픔에 헐덕이는 교만을 데리고, 이리저리 음식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교만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정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
한참 길을 가다가 <짐승>이 멈춰섰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슬픈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무엇인가 선택해야 함을 느꼈다.
교만에게 나를 줄지, 아니면 도망칠지…
처음부터 그것은 내가 감당할수 있는 짐승이 아니었다.
나는 짐승으로 부터 멀어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것이 내가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목회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목회가 쉽지 않다’고 푸념의 말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반전의 대답을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겪는 고통을, 단순한 고통으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너무 자주 들은 이야기라 별 감동없이 들어오던 이야기인데, 이날은 특별한 감동과 충격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조금더 이야기를 합니다. “고통이 몸으로 밀려 들어오면, 주님을 찔렀던 못이 나에게 들어온다 여기고, 고통이 마음으로 들어오면, 주님을 찔렀던 창날이 내 마음에도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한 발 더 나갑니다. “고통이 더욱 심해져서, 죽을 것 같으면, 이제 내가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자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목회 2년차를 갖 넘긴 애송이 목사가, 목회때문에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평생 이길을 걸은 선배목사님들을 생각하고, 숱한 시련을 겪은 어른들을 생각하면 아이의 푸념일 뿐입니다. 그러나 친구 목사의 조언은, 앞으로 내가 목회 가운데 겪게될 고난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시각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목사로서 목회 현장에서 겪는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의 십자가>가 요구됩니다. 이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 없으면 질 수 없습니다. <자기 욕망, 자기 꿈, 자기 애, 자기 추구가 있는 사람>은 그 길을 다 마치지 못합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주인 앞에서 자기를 부인한 사람만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일차 전도 여행의 끝자락에서 사도 바울은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돌팔매질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판단 했고, 성밖으로 시신을 갖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고 살아아나, 2차, 3차, 4차, 전도여행을 이어갑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는 고백은 이런 배경속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고난은 <피해야할 두려움>이 아니라, 기꺼이 짊어져야 할, <예수님의 흔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이 죄 때문에 왔다면, 그 고난은 소모적인 고난이고,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할 고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온 고난>이라면, 이것은 <영광의 고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고난입니다. 물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을 주실 것이고, 이기게 하실 것이고, 결국 주님의 부활처럼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것이 마침내 영광으로 가는 길입니다.
“잘 지내시는가?”
철모르는 전도사 시절,
인내로 돌봐주신 목사님께서
안부를 물어 오셨다.
개척 2년차!
‘무어라 답을 드릴까?’
‘잘 지낸다’라고 하기엔
목회가 순탄치만은 않고,
‘어렵다’고 하기엔
주님의 은혜가 있어 아직 버티며 나간다.
그래서 이런 고백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려움>이란 군중에 둘러싸여 삽니다.
그러나 <믿음>이 때때마다 찾아와 주고,
<소망>이 멀리서 안부를 물어줍니다.
<난관>이 곤란을 던져 줄때마다,
<지혜>가 밤늦게 찾아와 주고,
<비교>가 조급함을 가져오면,
<자족>이 찾아와 마음을 진정시켜 줍니다.
<욕망>이 마음에 분탕을 일으키면,
<절제>가 와서 권면하고,
<은혜>가 마음을 토닥입니다.
<어려움>이란 군중에 매일 우겨쌈을 당합니다.
그러나 <언약>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말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웁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친구들때문에
오늘을 이기며 살고,
또한 내일도 이기길 원합니다.
개척 2주년이 지났습니다. 교회는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3일간의 말씀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저는 지난 2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걸어온 것일까? 앞으로 어떻게 걸어야 할까? 혹시 돌아보고 조정해야 할 것은 없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추구해야 할 세 가지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첫째, 교회는 복음 위에 세워졌고, 복음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둘째, 교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생명력을 갖는다; 셋째,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교제하는 공동체이다.’ 라고 말입니다.
세 가지의 모습은 성경안에 드러난 <참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아주 건전한 추구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서 뭔지모를 부족함이 느껴졌습니다. 세 개의 문장이 생명력을 잃은 구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곧 답을 찾았습니다. 세개의 구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호속에 담긴 제 속사람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제 속사람이 사역의 열매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를 통한 교회 확장, 생동감 넘치는 교회,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라는 목표를 성경적 근거를 통해 구호화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4-5절>을 통해, 저의 생각을 수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교회의 열매는 <선교의 확장>, <성령 충만>, <성숙한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되어야 할 일은, 교회가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제 아무리 수고를 한다해도 아무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혹여나 우리의 열심이, 열매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낸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먼저 힘써야 할것은 것은,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인데, 저의 속 사람은 열매에만 집착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마음을 지적하셨고, 수정해 주셨습니다.
은혜와 평강 교회는 3주년을 향한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100명 성도, 12명의 소그룹 리더, 1명 선교사 파송>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안에 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주님의 때에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일으면, 열매없는 방황이 시작됩니다.
다른 어떤 수고보다, 주님께 붙어 있으려는 몸부림을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다면, 3주년을 향한 우리의 항해는, 열매가 보장된 항해입니다. 이 항해를 이끌어 가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얼마전, 쿠바 비젼트립을 다녀왔습니다. 떠나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데, 주님께서 마음속에 주시는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족도 아니고, 교회의 일도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월 2일 아침에, 카톡을 통해서 성도들과 <매일 성경> 큐티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22장 37-38절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비젼트립을 다녀올때와 같은 맥락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침 묵상을 마치고, 로즈 사모님의 집에 병문안을 갔습니다. 로즈 사모님은 우리 교회에게 건물을 내어 주는 파크런 교회 담임 목사님의 부인이십니다. 1년전에 암을 발견해서, 지금까지 투병해 오고 있었습니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면서 좋아지시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 다시 아쉬운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암이 폐로 전이 됐고, 3개월 정도 사실것 같다는 것입니다.
집으로 들어갔을 때, 사모님은 햇빛이 밝게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 <성경 말씀>으로 십자수를 두고 계셨습니다. 모습은 평소대로 평온 하셨고, 얼굴에서 광체가 나는듯 밝았습니다. 생을 마감하고 있는 말기암 환자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모님께서 십자수의 내용을 펼쳐 보여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아침에 묵상하고 나눈 말씀을 다시 보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또다시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해라”라고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것이 힘든 사모님은, 힘을 내어 몇마디를 하셨습니다. “몸에서 느끼는 고통은 없습니다. 그런데 곧 주님께 갈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요. 성언이에게도 인사를 전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투병중에 직접 뜨신 목도리 두개를 성언이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 교회가 예배 마지막에 부르는 찬양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그것을 불러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성언이 엄마와 저는 유투브에서 찬양을 찾아, <믿음으로 서리라>를 불러 드렸습니다. 찬양내내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집을 나오기 전에 저희는 사모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라갈 좋은 사역자의 본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즈 사모님께서 답을 하셨습니다. “주님만 사랑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언 엄마는 사명을 마치고, 주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하시는 사모님께, 듣고 싶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의 마지막 말씀과 십자수가 모든 것의 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만 사랑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또다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해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요청에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네, 주님만 사랑하겠습니다. 주님께만 충성하겠습니다. 주님께만 신실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죽는날 까지 우리를 주님의 종으로 붙들어 주십시요.’ 장미꽃을 볼때마다 로즈 사모님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씀이 향기처럼 뿜어져 나올 것 같습니다. “주님만 사랑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매주 저를 짖누르는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설교 준비입니다. 주일 설교를 끝내면, 월요일 저녁까지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러나 화요일부터 설교에 대한 스트레스가 문득 문득 몰려옵니다. 목요일이 되면 그 강도는 몸으로 느낄 만큼 세어지고, 금요일 저녁부터는 최고조에 오릅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신앙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죄의 성품을 지닌 우리도, 염려에서 오는 스트레스, 두려움에서 오는 스트레스, 만족하지 못함에서 오는 스트레스, 관계의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등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이 스트레스를 줄일까요? 신앙적인 관점에서 세가지를 제시해 봅니다.
첫째, <목표 기준>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발전적 삶을 위해 적당한 기준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준이 나와 주변에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건강한 기준이 아니라, 자기 욕심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준이 여러분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조정이 필요한 기준입니다.
둘째, <주어진 만큼> 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취는, 그에게 주어진 은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요리를 전공한 사람에게 자동차 엔진을 고치라고 요구하시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에게 마라톤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주신 은사 만큼,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만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의 크기와 경험을 이해하고, 그 분량 만큼 감당한다면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셋째, <때>를 기다릴줄 아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때가 있습니다. 닫히는 때가 있다면, 열리는 때가 있고, 심는 때가 있다면, 거두는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의 의지 여하에 달린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따라 진행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열심히 두드려 봅니다. 그러나 열리지 않는다면, 한발 물러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를 무시하고, 조급함으로 때를 당겨내려 하면, 갈등과 스트레스가 시작됩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설교와 칼럼에 대한 스트레스로 씨름을 했습니다. 이 스트레스의 강도가 심해지면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따라 하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만큼만 준비하자! 그 이상 하려는 것은 욕심이고 교만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고나면 뭔가 특별한 것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은 줄어 들고, 본문이 말하려는 일차적인 메세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풀어가다 보면, 또 한편의 설교가 완성되고, 목사로서의 사명 하나를 마칩니다.
대부분의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될 때 심해집니다. 나의 안전, 나의 평안, 나의 명예에 집착하다보면, 기준이 높아지고, 분수 이상의 것을 취하려고 하고, 조급함때문에 때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스트레스의 근본적인 해결은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나의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많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연습을 계속 해 나간다면, 우리 안의 스트레스도 지금보다는 좀더 줄어들 것입니다.
고등 학생 때의 일입니다. <생명의 소리>라는 기독교 동아리가 있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일학년 때 한두번 참석하고, 그 후로는 관심이 없어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학년때, 같은반 친구 녀석이 그 동아리 예배에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그날이 회장을 뽑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고, 친구와 함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친구의 말대로, 예배 후에 회장선거가 있었습니다. 방식은 이랬습니다. 맴버들이 40일간 저녁 금식을하며 회장 선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당일날 후보를 추천합니다. 그 다음 과정이 압권인데, 추천된 후보들은 앞으로 나와서, 인원수 만큼 준비된 제비를 한장씩 뽑습니다. 그 중 하나의 제비에만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을 뽑는 사람이 회장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이지만, 용감한 고등학생의 믿음이 아니면 감히 적용해보기 어려운 방식이었습니다.
후보의 자격은 대략 이랬습니다. 1) 동아리 예배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 2) 선배들로 부터 신앙이 검증된 사람; 3)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조건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터졌습니다. 어떤 선배 형님이 저를 후보로 추천한 것입니다. 일면 일식도 없던 선배였습니다. 제가 후보로 추천되는 순간, “왠 뚱딴지?" 라는 듯한 분위기가 음악실 전체를 매웠습니다.
더 황당한 일이 제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후보로 추천되는 순간, 내가 회장이 될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하길 ‘하나님,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거죠? 저는 이 동아리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로 <십자가 제비>를 뽑았습니다. 저는 난감 했고, 선배들은 황당해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하던 녀석이 와서 동아리 회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배들은 그것을 저녁 금식 40일에 대한 응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고등학교 2학년의 시간을 <생명의 소리>라는 동아리의 회장으로 보냈습니다.
<제비>의 결과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졸업후에 선배들은 저를 JDM 이라는 선교단체로 이끌어 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서관옥 선교사님은 저를 독일에서 열리는 <제 1회 JDM 유럽 선교대회>에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김세정 이라는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10년 뒤, 김세정 자매와 저는 그 단체의 훈련 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났고, 지금은 부부가 되어, 여러분 앞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인생이 <사람이 정한 계획>을 통해서 전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전진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누누이 언급합니다. 계획없이 살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계획하고 실행 하십시요 그러나 정한 계획에 집착하지 마십시요. 그것이 무너진다고 모든 것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그것을 잘 준비한다고, 삶이 계획대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던지시는 <제비> 하나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바꾸었던 많은 것는 우리가 상상하거나 예상하지 않았던 요소들입니다. 그 예상 할 수 없는 제비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앞에 깨어 있고, 믿음으로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6.25 전쟁 전까지, 제 고향 마을은 북한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는 남한땅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땅을 관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그곳에 이주 시켰습니다. 땅을 개간하고 살면, 나중에 소유권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그 곳에 들어 가셨고, 아버지때 까지 땅을 일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아직도 그 땅의 소유권을 개인들에게 넘겨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땅에 대한 경작권만을 소유한체 살아갑니다.
결혼을 하려 할 때, 돈이 너무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사업에 실패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형님은 저에게 <땅의 경작권>을 팔아서, 결혼식을 치루고, 방이라도 한칸 얻으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마침, 동네 형님이 그 땅을 팔아 주겠다고 제안 하셨고, 계약을 위해 저는 버스를 타고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비록 경작권이지만, 갑작스레 땅을 팔게 되어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00만원을 더 요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신문을 훝어 보던 중에 <오늘의 운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일이 틀어지는 날” 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마음이 흔들려서 점꽤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점꽤를 따르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500만원을 더 달라고 반드시 말한다” 라고 말입니다.
그 결과가 어땠을까요? 드라마 같은 간증에 익숙한 우리들은, 소원대로 500만원을 더 받고 땅을 잘 팔았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점꽤가 맞았습니다. 계약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후회하거나, 안타까웠던 적이 없습니다. 저는 신앙을 선택했고, 절박한 순간에 <번영>을 약속하는 점꽤를 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땅을 팔지 못했다고, 제가 결혼을 못한게 아닙니다. 가난해서 망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잠시 치뤄야 하는 고통의 시간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나를 삼킬 고통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누구보다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분에 넘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땅은 아직도 우리 고향 마을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지난달, 저희 형제는 소천하신 어머님을 그 땅에 모셨습니다. 다른 곳에 계신 아버님도 내년에 그곳으로 모실 계획입니다.
얼마 전, 고향에서 뉴스가 날아왔습니다. 정부가 그 땅의 소유권을 개인들에게 돌려주려고, 주민들과 만남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땅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는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가족들이 처리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뉴스가 저에게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인생을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깁니다.
새해가 되면서, 그리스도인 조차 점꽤를 찾아 어슬렁거립니다. 점장이가 여러분 코앞에 놓인 미천한 미래에 대해서는 몇마다 던져 줄지도 모르지만,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섭리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된다면 아무곳에나 가고, 아무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 길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은 주님을 의지하는데서 나옵니다.
요전날 가스펠송 하나를 듣다가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목은 <요게벳의 노래>였습니다. 생소한 이름 요게벳은 <모세>의 어머니입니다. 이집트왕 바로가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 했을 때, 모세의 엄마는 최후의 선택을 합니다. 갈대 상자에 아기를 담아 나일강에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노래는 아기를 보내야하는 엄마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갈대 상자에서 손을 놓는 순간, 그 아이의 운명은, 엄마의 보호를 떠나, 전적으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이 가사가 통곡을 만든것입니다. 청소를 하던 아내가 다가와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나도 다 이해 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아내가 다 이해 할 리 없습니다. 저도 단지 그 가사가 한 아이의 아빠로서 공감되어 그런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한국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고향에 계신 엄마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동철이 왔니? 우리 동철이 왔니?” 라고 귀찮도록 외치며 뛰쳐 나오셔야 할 엄마는 없고, 영정사진속 고요한 엄마만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장례를 다 치루고 아내가 그때의 통곡에 대해 말하며, 그것이 어머님의 죽음을 예고했던것 같다고 말입니다.
저는 5형제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많이 아프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다른 가정에 보내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저를 품에서 놓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 엄마는 마지막 숨을 내 쉴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막내 아들을 두고 떠나는 것을 아파하지는 않았을까? 마지막 숨을 몰아 쉬실 때, 막내 아들의 삶을 <참 주인, 참 부모>이신 하나님께 부탁하지 않으셨을까? 엄마의 그런 마음이 노래 속에서 전달 되어, 미리 내 속에서 <통곡>이 된것은 아닐까? 많은 생각이 오가고, 마음이 아립니다.
돌아오는길에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고아야!” 정말 고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12년 전에, 어머님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원한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소부재(無所不在)하여, 언제 어디서나 <보호막>이 되어 줄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우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납니다. 의지할 분은 <참 주인, 참 부모>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기댑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재림은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한 것이고, 제자들과 바울이 전한 것이며,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정통 기독교 신앙>이고, 교회의 <중요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 교리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신도를 끌어 모으기 위한 자극제로 사용했고, 충성을 강요하는 동기로 가르쳤고, 재물을 빼앗는 협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교회 강단에서 <재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분들이 <주님의 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와 왔다는데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단적 종말론>에 대한 두려움과 <성경의 진리>라는 경계사이에서 잘 정리되지 않은 모호한 감정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가지를 정리하여 권면합니다.
첫째, <시간과 때>에 관해서 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속에 감추인 것입니다 (행1:4, 살전 5:1). 때문에 누군가가 재림에 대해 <때와 시기>를 구체적으로 말 한다면 그는 거짓의 사람입니다.
둘째, <준비>에 관해서 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재림의 날을 맞는 두 사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둠을 받습니다 (40). 두 사람이 <멧돌>을 돌리는데, 한 사람을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남겨 둠을 받습니다 (41). 그들은 <동굴이나 기도원>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은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즉 밭에서 일을 하고, 멧돌을 돌리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았습니다. 삶의 현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요. 지금의 삶에 성실하고, 그 현장에서 깨어 주님과 동행하시는 것이 준비입니다.
셋째, <환난>에 관해서 입니다. 주님의 재림 전에 성도들은 환란을 겪을 것입니다 (마24:9). 그리스도인은 감옥과 죽음에 넘겨 질 것입니다. 그 이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환란을 통과한 <영웅들>이 주님의 재림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영웅들이 환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도와 환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야겨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마십시요. 주님을 진실로 의지하십시요. 주님이 모든 환난을 이기도록 힘을 주십니다.
세상이 혼란 스러워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것 같은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주님은 이때에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 바른 생각 안에 머물러 있으시기 바랍니다. 늘 그랬듯이 진리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십시요. 이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가장 바른 태도입니다.
댄스곡이 유행하던 시절, 나는 또래들과 다르게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길을 걸을때는 <사랑했지만>을 흥얼 거렸고, 노래방에 가면 <일어나> <붙이지 못한 편지>를 뽑아냈습니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어느 60 노부부의 이야기> 라는 노래도 공감 할수 있었고, 즐겨 불렀습니다. 그의 노래에는 뭔지 모를 <마약 가루> 같은 것이 뿌려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약 가루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자기연민>이었습니다.
<자기연민>은 <자신을 가련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마음을 통해서 잠시 쉼을 가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서 다시 일어나게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보면, 내게 주어진 삶을 부정하게 됩니다. 무기력과 허무의 늪에 빠집니다. 그런데도 그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연민은 <마약 가루>같습니다.
지난주 저는 <캐나다 한인 침례교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녁에는 말씀 집회도 있었습니다. 교회 개척과 여름 사역으로 달려온 저는 <위로와 재 충전>이 필요했습니다. 집회를 통해서 위로의 말씀을 듣기 바라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해 주십시요. 제가 듣겠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은 열왕기 상 19장, 엘이야 선지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바알선지자 40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가 영과 육이 지쳐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탈진이 있기전까지 엘리야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탈진 속에서 하나님께 고백하기를 “나는 나의 조상들 보다 낫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어루 만지시고, 먹을 것과 물을 공급해 주시며, 계속해서 잠을 자게 하십니다. 마침내 그가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힘을 얻은 엘리야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40일 밤낮을 걸어, 호렙산으로 갑니다. 호렙산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났던 산입니다.
얼핏 보면 엘리야의 행보는 의미있고 거룩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산에서 영적인 재 충전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입니다. 호렙산은 엘리야가 올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위로는 받을 만큼 받았고, 회복도 될 만큼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이상 하나님이 그에게 해줄 특별한 일은, 강한 바람 속에도 없고, 큰 지진 속에도 없으며, 거대한 불 가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가야할 곳은 그의 사명지 <북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호렙산 동굴에서 여전히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호렙산 동굴>에서 나와 그의 영전 전투지인 <북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한방에서는 <양귀비>를 가끔 귀한 약제로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래 쓰지 않습니다. 오래 쓰다보면 서서히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끔 <자기 연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 있지는 마십시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이 가을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알고 지내는 형제를 심방했습니다. 형제가 묻습니다. “목사님, 사역 하느라 많이 바쁘셨지요?” 질문에 답했습니다. ‘정신없이 사역하다가 하나님을 잃었어!’ 동행한 딸 성언이가 묻습니다. “아빠, 무슨 말이야?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 했는데, 하나님을 잃다니?” 질문에 답했습니다. ‘성언이는 잘 이해 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게 있어...나중에 크면 이해 할거야!’ 그렇습니다. 사역을 열심히 하다가 하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저의 심령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빠지기 시작한것은 1주년 기념 예배를 준비하면서 입니다. 개척 교회라 일꾼이 적으니 목사인 제가 하나 하나 다 준비해야 했습니다. 결국 행사를 멋지게 잘 치뤄고, 사람들에게 칭찬도 들었습니다. 곧 이어 캐나다에 손님들이 몰려오는 여름이 되었습니다. 찾아 온 분들에게 섭섭하지 않게 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해 손님들을 맞이하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어 여름 원주민 선교가 시작 되었습니다. 선교를 계획하고, 팀을 교육하고, 바자회를 했습니다. 모두 훌륭히 잘 치뤘습니다. 그리고 4,000km를 오가는 선교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일을 다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은 가시지 않고,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머리는 계속 해서 뭔가를 계획하고, 나의 생각과 기준들은 강해졌습니다. 며칠 동안 저의 상태를 점검하다가 알았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열심히 사역하다가, 하나님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앉아서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화가난 마르다가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마리아가 일어나서 자기의 분주함을 돕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41절과 42절에서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마르다가 아니라 주님앞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손을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던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5장 7절, 8절에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들의 열심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것이 문제였습니다.
뜨거운 여름,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다 마치고 났더니, 제 마음에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사라졌습니다. 이 얼마나 코미디같은 일입니까? 여름 내내 시트콤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주님을 찾게 되면, 여름의 수고들이 모두 헛된것은 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여름이 지나갑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옵니다. 저녁에는 귀뚜라미 소리도 들려옵니다. 분주함을 내려 놓고, 마음에 계신 주님께 집중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야 익은 열매를 얻게 될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의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소망합니다.
자주, 그리고 가볍게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야만 구원의 열매가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죽음이 두려우셨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담담히 받아들이십니다. 자신이 죽으셔야 구원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어떤 형태로든 죽음이 있어야 맺혀집니다. 요한 복음 12장 24절은 가벼운 말씀이 아닙니다.
지난 주 은혜와 평강교회는 <케이프 브레튼 원주민 선교>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왕복 4,000KM 를 달렸습니다. 그곳에서 저희는 이근권 선교사님이 준비한 원주민 선교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토론토를 포함해서, 한국, 아르헨티나, 그리고 주변 도시인 헬리팩스와 시드니에서도 한국 분들이 오셨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집회를 했는데, 참으로 뜨거운 말씀 집회였습니다. 함께 참석한 권사님은 마치 70-80년대 한국 교회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선교사님을 따라 원주민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케이프 브레튼>은 한국 교회에게 아주 의미 있는 곳입니다. 맥킨지 선교사님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맥킨지 선교사님은 1893년 10월에 조선왔고, 최초의 한국 교회인 <소래>교회를 목회 하시다가, 1895년 7월에 소래에서 소천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많은 캐나다 젊은이들이 조선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약혼녀 맥컬리 양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맥킨지 선교사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캐나다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 선교에 헌신합니다. 그리고 <평양 대 부흥 운동>의 기원이 되었던 <하디 선교사님> 과의 기도회를 화이트 선교사와 함께 열어, 한국 교회 부흥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맥컬리 선교사님이 맥킨지 선교사님을 기리면서 쓴 책이 <한 알의 밀알>입니다.
<케이프 브레튼>은 캐나다 동쪽 끝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인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원주민 선교를 위해서 한국 선교사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 뜨거운 집회를 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맥킨지 선교사는, 병중에 죽어가면서,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128년후, 조선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자기 고향으로 와서,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곳의 숨겨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복음의 원리대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다시 요한 복음 12장 24절을 기억합니다.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수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무거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내 인격이 죽던, 생각이 죽던, 아니면 정말 생명이 쓰러져 가던, 죽음이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 죽을 용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죽기를 소망합니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현리> 이곳이 저의 출생지 입니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나를 낳으시고 기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내가 자라날 환경과 그 속에서 나를 맡아 키우실 부모님이 정해졌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성격과 가치관은 형성되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 아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여름이면 빤스 한 장 입고 냇가에서 하루 종일을 보냈고, 가을이면 볏짚을 쌓아둔 논에서 작은 아지트를 만들었습니다. 겨울이면 비료푸대로 눈 썰매를 탔고, 봄에는 진달래를 꺽으러 분홍빛 산에 올랐습니다. 매 순간이 환상적인 놀이터 였습니다. 그러나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 부모님입니다. '엄마는 왜 아프실까? 부모님은 왜 좀더 화목할 순 없을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찬란한 자연, 그리고 매일 마주해야 한는 생활 공간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게 주어진 <삶의 패키지> 였습니다. 그리고 그 패키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개척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가끔 두 가지의 성품이 필요했습니다. 이상을 보는 <낭만 주의>와 삶을 관통하는 <통찰력>입니다. 이것들이 필요 할 때마다 저는 제게 주어졌던 <삶의 패키지>를 뒤적입니다. 그 안에는 진달래를 꺽으러 분홍빛 산을 오르던 소년의 낭만이 들어 있고, 풀리지 않는 인생의 질문과 씨름 했던 진지한 묵상이 있었습니다. 그 패키지를 들추어, 글을 쓰기도 하고,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상황을 판단하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내게 주어진 삶의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을 가지고 저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내가 돈을 번다고 말합니다. 내가 권력을 쥐었다”고 말합니다. 서점을 잔뜩 채우는 자기 개발서는 <돈 버는 방법과 권력을 취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들은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 지는 것임>을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하나님께서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당연히 안되는 일도 하나님께서 여시면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께서 열고 닫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경외함으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록, 성경을 알아 갈 수록 <주어지는 삶>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에 대한 사람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 가십시요. 열심을 내서 살아 가십시요. 그러나 그 최선이 여러분의 삶을 바꾼다고 신뢰하지 마십시요. 최선의 이유는 단지 그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기억하십시요. 배신의 상황이 주어지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열심히 살았습니다. 노예의 삶이 주어지면, 또한 그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감옥의 삶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 자리가 주어졌고,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보면 내가 담담해야 할 마땅한 자리가 주어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최선>을 올려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삶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 지는 것입니다.
창피하지만 저는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아버지의 팔을 베고 잠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냄새를 맡고 잠들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유독 잠 못 이루시던 밤들이 있었습니다. 집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시던 일이 뜻대로 안 되실 때 였습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밤새 뒤척이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면서, 아버지의 잠 못 이루시던 밤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짊어지셨던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심과 염려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잠자고 싶은 육신을 근심과 염려가 깨우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은 2016년 불면증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들이 54만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수치는 수면 장애를 질병으로 여기고 병원을 찾아온 사람의 수입니다. 병원을 찾지 않고, 혼자 극복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한다면 그 수는 54만명을 훨씬 넘을 것입니다.
성경은 시편 127편 2절에서 <잠>에 대한 재미있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잠을 잘자는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 4편을 보면 그 말씀의 뜻을 좀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편에서 저자 다윗은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어려움은 자신의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 멈추지 않고 추격해오는 사울왕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환경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은 "평안히 눕고 자겠다"고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사울의 광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드린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풍속에서도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풍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 광풍이 나를 삼킬까 두렵기도합니다. 그런데 삶을 주관하는 것은 <광풍>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우리가 광풍에 마음을 뻇기면, 종일 뒤척이는 밤을 보내야 합니다. 모든 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광풍뒤에 선하심을 나타낼 하나님의 기대하십시요. 염려와 근심을 옆으로 밀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안히 주무시기 바랍니다. 광풍속에서도 잠잘 수있는 믿음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귀한 집사님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은 토요일마다 몰에 나가 인도와 중동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저도 집사님을 따라 전도 현장에 나갔습니다. 집사님은 어떤 이발소 아저씨를 소개 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분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분도 아프카니스탄에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란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인도인이었습니다.
집사님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사람들 입니다. 이슬람 국가인 아프카니스탄에서 온 이발소 아저씨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는 가족 공동체를 떠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도 점쟁이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밥줄인 생업을 버려야 합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댓가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전도를 나갈때 마다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지금 내가 전하는 복음은 그들에게 가족 공동체를 떠나고, 생업을 포기 하라는 요청이다. 그렇다면 나는 복음 앞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내게 그런 각오가 없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넌센스다. 나에게 진정 복음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 일까?’ 라고 말입니다.
몇해전 서울대 김난도 교수님이 서울대 입학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놀이>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 놀이>를 하고 있고, 교수는 <교수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의 본질과 사명을 상실하고, 그 껍데기만 흉내내는 지식인들을 비꼰 연설입니다. 그 연설을 들으면서 저는 나 자신과 한국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진짜 영혼을 돌보는가? 아니면 <목회 놀이>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진짜 복음 전도자인가? 아니면 <선교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대가로 시작된 영생의 길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생업과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복음은 지금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다해 복음을 사랑하고 그 믿음안에 서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복음의 값어치를 생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김난도 교수님의 연설처럼 우리도 <교회 놀이> <목회 놀이> <선교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복음앞에서 생명을 드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목사인 저에게도 참으로 무거운 질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할 뿐입니다. 평안한 이 세상에서 이 질문은 너무 과격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복음은 생명으로 시작되었고, 믿는자들에게 생명을 다해 충성 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 요구앞에 서지 않으면 우리 신앙의 진위를 점검할 수 없습니다. 이 요구 앞에 여러분의 삶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와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약속을 믿고 요단강을 건너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 전쟁은 무모해 보이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전쟁을 시작했고 결국 승리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배 됩니다. 그러나 각 땅에는 여전히 몰아내야 하는 잔존 세력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파들은 자신들에게 분배된 땅에서 그들과 싸워야만 온전히 그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른 지파들에 비해 성공적으로 땅을 정복해 갔습니다. 특별히 갈렙은 아낙 자손과 싸웠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장 무서워하는 족속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보다 월등히 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들과의 전쟁을 피하지 않았고, 결국 승리로 전쟁을 끝냅니다.
정 반대의 지파도 있었습니다. 단 지파입니다. 그들에게 분배된 땅에는 아모리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단지파는 그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도리어 산악 지역으로 쫓겨납니다. 그리고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후에 단 지파는 자신들이 살 땅을 찾기 위해 가나안땅 여기 저기를 방황해야 했습니다.
2,000년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들를 향해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사단은 마지막 까지 저항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는 이미 교회에게 약속되었습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전쟁을 수행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리고, 상황에 겁을 내서 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교회들은 길을 잃고 방황합니다. 단지파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캐나다 원주민들에게 나갈 것이고, 북한 동족들을 마음에 품을 것이며, 토론토에 들어온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은혜와 평강교회가 믿음으로 취해야 할 우리들의 분깃입니다. 성도들 개개인의 삶도 이 사명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 학교, 직장, 사업, 그리고 건강, 행복, 평안도 이 사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개인에게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믿음의 분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분깃을 취해 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께 나가는 삶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황이나 환경이 여러분의 마음을 흔들때마다 다시 말씀안으로 들어가시고, 성령께서 용기 주실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들이 승리합니다.
성도가운데 한 분이 <상한 심령으로 서라> 라는 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개혁주의 침례교 설교자인 존 번연의 책입니다. <천로역정>으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이 책에서 존 번연은 “하나님은 상한 마음 안에 거하신다” 라고 말합니다. 상함이 없이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릴적 저의 마음은 늘 상해 있었습니다. 아픈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상해있었고, 가난하고 화목하지 않은 아빠와 엄마 때문에 상해 있었습니다. 가슴아픈 현실속으로 빠져드는 형제들의 삶을 보며 상했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교회,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내 삶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많이 들은 설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어린 마음에 반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께서 모두 허락하시는 고난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한 분이 아니신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고난의 이유를 명확하게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에 일어난 고난으로 나는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함과 자기 중심성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도 하나님께서 상함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때 늘상 듣던 그 설교에 이제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마음에 상함이 없다면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마음의 상함에서 옵니다. 죄때문에 마음이 상할때, 십자가가 보입니다. 고난이 찾아와 마음이 상할때, 무릎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상함이 없이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습니까? 역설적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마음에 상함을 입은 사람,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 진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상함을 입는지 아십니다. 그 상함이 너무 크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더욱 바라는 것은 <믿음이 성숙해서 상함이 없이도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을 상하게 하신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축복임을 믿음 안에 고백합시다. 주님의 선하신 주권은 그의 백성을 사랑으로 견고히 붙드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고 선하십니다.
살다보면 막막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그럴때 마다 성경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많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열왕기하 18 장과 19장에 나온 히스기야왕의 이야기는 더욱 그러합니다.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1) 첫째, 그 당시 앗수르 제국을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국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강대국 이집트 마저도 앗수르에 의해 조롱을 당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왕하 18:21). 2) 둘째,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저항할 내부적인 힘이 없었습니다. 앗수르는 이미 유대의 중요한 성읍들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왕하 18:13). 3) 셋째, 히스기야는 다른 나라에 용병을 요청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오래 전 앗수르의 요구에 따라 국가의 모든 재정을 조공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왕하 18:15,16).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보내온 편지를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펼쳐 놓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내용이 가득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펼쳐놓고 엎드립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보면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대책을 세워야 할 왕이 긴박한 상황에서 가만히 엎드려 기도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 안에 전염병이 번집니다.십팔만 오천명의 앗수르 군인들이 하루 아침에 시신으로 변합니다 (왕하 19:35). 더이상 전쟁을 수행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산헤립은 남은 군대를 정비해서 앗수르로 돌아갑니다. 본국으로 돌아간 산헤립은 구테타를 일으킨 두명의 아들에 의해 살해됩니다. 히스기야왕이 위기에서 한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만히 있은 것 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순간은 늘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가만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무능력해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시간입니다. 시편 46편 10 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셨던 아버님은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이란 책을 펼치셨습니다. 생년월일을 통해서 그 해의 운수를 보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세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점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운수에 관련된 책이나, 잡지 또는 인터넷을 뒤적입니다. 미래를 알고 싶어서 입니다.
성경은 미래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전도서 3:11). 미래를 여는 것은 사람의 열심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잠언 16:9). 인간이 할 일은 단지 오늘 주어진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올라가고, 하나님께서 낮은데 머물게 하시면 낮은데 머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 입니다.
<오늘에 충실한 삶>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가 물질을 구할 때, “일용할 양식” 즉 하루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며, 1년치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6:11). 주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3)”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신접 해서 미래를 말하는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8:9-14).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인데 사람의 잔 재주로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017년 11월 25일 조선일보는 무속인 통계를 발표했습니다. 2006년에 14만명 이었던 무속인은 2017년에 100만명이 넘었습니다. 개신교 성직자 14만명에 비해서 월등히 많은 숫자입니다. 무속 신앙을 교육하는 학원은 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삶속에 무속신앙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입니다. 교회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점집을 드나드는 일은 이제 흔한 일입니다. 성도들은 인터넷과 신문에 나온 운세코너를 자주 들어가 확인합니다. 재미로 본다고 말하지만, 영혼 깊은 곳에는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한 의존이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운세는 여러분에게 불행과 행운에 대한 미천한 코멘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 속에서 십자가는 불행이고 끔찍한 사고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것은 영원으로 향하는 문이였습니다. 믿음의 삶은 이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삶입니다.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우리 안에 들어온 불신앙적 요소들을 모두 불태우는 2018년도가 되시기 바랍니다.